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티 미클로시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추축국 지도자들 중에서 전쟁에 제일 소극적이었던데다, 그가 밀려난 후 집권한 [[화살십자당]]이 하도 '''짧고 강렬한 막장'''이던 탓에 [[다시 보니 선녀 같다|상대적으로 나은]] 평가를 받기도 한다. 하지만 192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, 이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헝가리는 1927년부터 기존에 쓰던 크로네 화를 버리고 [[헝가리 펭괴]]를 발행해야 했다.[* 헝가리는 패전 직전인 1945년에도 또 한번 초인플레이션을 겪어 펭괴를 폐지하고 현재까지 [[포린트]] 화를 쓰고 있다.] * 가톨릭 다수 국가인 헝가리에서 이 비범하고 해괴한 섭정 각하의 종교는 '''[[칼뱅파]]'''였다. --왕 없는 나라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-- 헝가리 동부를 흐르는 [[티서강]]을 경계로 서쪽은 확실한 가톨릭 다수 지역이지만 티서강 동쪽의 헝가리 동부와 [[트란실바니아]]는 개신교인 [[개혁교회]]의 세가 상당히 강했다. 왜냐면 중부유럽에서 한창 [[종교개혁]]이 유행할 당시 헝가리는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지배 아래에 든 서부지역과 [[오스만 헝가리|오스만이 직접 지배한 중부지역]], 그리고 오스만을 종주국으로 하여 [[헝가리인]]이 자치를 누리는 동부의 [[트란실바니아 공국|에르데이 공국]]으로 삼분할된 상태였는데, 개혁교회가 트린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 중심으로 퍼진 것이다. 그 유명한 트란실바니아의 바토리 가문도 칼뱅교와 연관이 있어서 [[가톨릭]]으로부터 누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고 헝가리 제2의 도시인 [[데브레첸]]의 경우는 '''칼뱅교도들의 로마'''란 별명이 있을 정도며 [[루마니아]] 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[[티미쇼아라]](Timișoara)도 개신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. 지금도 헝가리 전체인구의 13%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며, 그보다 더 동쪽인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의 경우 개신교 신자 비율은 47%까지 올라간다. 헝가리가 흔히 가톨릭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개혁교회의 영향력도 꽤나 유서 깊기 때문에 헝가리인이면서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딱히 유별나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다. 가령 [[오르반 빅토르]] 현 헝가리 총리도 개혁교회 신자이다. 여담으로 헝가리 개혁교회는 [[칼뱅주의]]를 표방하는 교단치고는 상당히 특이하게 '''[[감독]]제'''를 실시하는 거의 유일한 칼뱅주의 교회이다. * [[프랑코 정권|동시기의 스페인]]과는 달리 섭정 체제가 도중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, 그가 죽거나 헝가리 국민들에게 실각당할 때까지 섭정 체제가 계속되었을 경우의 상황은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. 공화정, 혹은 헝가리 의회가 새 섭정을 뽑든가, 아니면 1921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 사후 [[보르본 왕조]]를 복위시킨 스페인처럼 [[오토 폰 합스부르크]]를 [[호이4|옹립]]시켜 합스부르크 왕조를 [[왕정복고]]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. 또는 왕정복고를 하되 헝가리의 적당한 귀족 중의 하나를 왕으로 옹립시키거나, 아예 [[곤도르]]나 [[마차시 1세]]처럼 스스로 왕위에 올라 '''호르티 왕조'''를 [[내독나없|개창]]할 수 있었을 것이다. 호르티 제독 본인은 1942년 장남 호르티 이슈트반(István)을 부섭정으로 세웠으나, 그 해 8월 이슈트반이 탄 헝가리 [[공군]]기가 추락해 사망한 뒤에는 다음 부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. * 그의 이름을 딴 [[나는 호르티 미클로시의 병사]]라는 군가가 있다. 호르티 미클로시의 집권시기 사실상 [[준국가]]로 불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